고백

김상봉 교수의 '진보의 재구성'을,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 온 '진보는 죽었다'라는 선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물론, 새롭지 않은 선언이다. 그리고 주체의 죽음, 궁극적인 목적의 부재, 유토피아와 전체주의 간의 내밀한 거래 등등의 또 다른 선언들을 들으면서 학생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무언가 절실한 느낌이 밑에서부터 솟아 오른다.

 

"믿음의 자유란 내가 무언가를 믿기 전에만 가능하다는 것."

 

간단한 이치이다. 자유를 아주 낮게 이해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란 그저 '선택의 자유'라고 생각해도 말이다. 내 앞에 기독교, 불교, 천주교가 있고, 내가 신자가 아닌 다음에는 이것저것 따져 보면서 무엇을 믿을지 선택할 자유가 있고, 그 누구도 이 부분을 건드리거나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믿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전혀 다르게 변한다.

 

그때 부터는... 내게 남겨진 자유란, (믿음의 교리에 비추어 보았을때) 올바른 것을 선택할 자유뿐이 남지 않는다. 즉, 내 믿음을 고수할 자유만이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란 언제나 무엇에 '계속해서 종속될 수 있는 보장의 요구'일 뿐이다. '종교의 자유'란 '이데올로기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항상 '지속적인 종속의 보장'이거나 더 정확하게는 타종교인이 나의 종속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실체 없는 법을 향해서 던지는 하나의 호소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지금과 같은 세속사회에서 보여지는 종교의 역설과 같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무신론'을 가장 탁월한 종교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역설과 마찬가지로. 즉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보편적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무신론'을 보편적인 종교로 인정하는 채 해야만 한다는 역설과 마찬가지로.

 

 

[...]

 

달갑지 않은 느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백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듣는 내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는 이제 정말로 하나의 청춘과 이별할때를 읊조리는 자기연민가이기 때문에 그렇다.

 

 

[...]

 

어디선가 들었던.... '이제 진보가 시대정신이다'라는 선언은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MB의 연속된 실정을 목소리 높여서 비판했던 유일한 세력은 중산층이었고, 이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전략이 부재하는 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맞다. 그리고 민주당도 국참당도, 그리고 민노당도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맞물린 MB의 실정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면, 공세적으로 대안을 그려내면서 세를 키우고, 남한의 민초들이 더 큰 고통 속에서 허우적 대지 않도록 당당한 집권세력으로 커나가야 되는 것도 맞다. 난 이것을 부정했던 적이 없다. 난 혁명정당이 아닌 분홍색의 대중정당을 능동적으로 선택했으니까. 그리고 현재 정치의 한계, 그러니까 정치의 완연한 봄을 가져다 주지 못한 겨울의 끝자락은 촛불의 한계이기도 하니까.

 

 

또한 나는 하나로 운동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지지뿐만 아니라 삼성을 위시한 보험회사들과 싸워서 이길 물리적인 기반, 계급적인 기반이 있어야만 한다. 또는 좋았던 시절의 유행어인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운동이 대중운동이 되기위해서는 운동 속에서 우리의 건강을 상품화(가치화)시키는 자본의 운동에 반하는 저항주체를 '적대적 계급'으로 구성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민주당도 관심을 가지고 이 운동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삼성과 건강보험의 적절한 타협으로 끝을 맺고 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운동이 2012년 총선의 의제가 된다한들 실제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판을 크게 만들고, 대중운동이 아닌 대중여론을 동원하고, 그럴듯한 장미빛 그림을 그리면서 나아갈 수 있는 세력이 민주당인 한, 결국 진보정당의 물리적인 힘이 없다면, 지도부들이 집권을 위한 정치공학 계산에 빠져있다면, 복지를 얼마만큼 확대하느냐가 유일한 정치적 싸움이 된다면, 그것은 미국식 양당체계가 아닐까?

 

 

그럼에도 난 이것에 반대하지 않느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기 때문에. 또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결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치세력인 중산층 위주의 복지가 되어간다면, 적절하게 유효수요을 조절해 가면서, 자본의 안과 밖이 나뉘어지는 또 다른 정치 시스템이 들어온다고 해도, 난 이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초대장의 갯수가 늘어날 것이고, 자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대기표의 갯수도 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난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을 저버렸을 뿐이다.  

 

 

[...]

 

정말 가끔은 형이상학적인 헤겔주의자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동하는 역사의 간지라는 걸 믿어 보고 싶다. 그 많은 열정, 피, 땀, 버려진 사람들의 눈물이 지금의 '진보'로 총체화-실현되어간다고 믿고 싶을 만큼. 또는 애초부터 이 땅의 운동정신이란 그 많은 사람들의 열정, 피, 땀, 버려짐으로 외화되었고 마침내 촛불로 되돌와서, 완벽한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어쨌든, 맑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머리를 기쁘게 짓누르는 것은 87년의 사건들(진정한 철학적 의미에서)이었고, 이제 마침내 보라색 망투를 걸치고 이곳저곳의 정치적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난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 이외에는 어떤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만 난 믿음을 저버렸을 뿐이다.

 

 

[...]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할까? 죽은 아이의 고추를 만지며 웃고 있는 사람들 곁이 아닌 다른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저 적절한 반대와 적절한 찬성을 투표로 표현하고, 진보정당의 지지율을 프랑스 사회당 지지율 보듯이 그저 하나의 정치적 가쉽거리로 생각하면서, 적절한 삶을 사는 것?

 

 

어쨌든 난 여전히 진보정당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믿음은 버렸다.  

 


p.s] 이데올로기란 어쩌면 인간이 소멸하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데올로기와 진리 또는 비이데올로기와의 대립이 변증법적 관계이고 이 둘을 초월한 객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리가 불가능한 한,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란 '진리로서의 이데올로기' 또는 '비이데올로기로서의 이데올로기'이다. 한때 진보진영에서조차 정치적 열정을 자아냈던 정치이데올로기들은 '꼰대들의 목소리' 또는 '비현실주의자들의 헛소리'로 격하되어가고, 오로지 전문적인 정책들이 가장 탁월한 담론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매우 보수적인 철학개념임을 알지만) 적절한 매개 없이, 반대편의 극단으로 달려가 '대립물의 직접적인 동일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즉, 현재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정책 담론'이라는 점.


로고스가 대중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와 국가관리체계가 전문화되고 분화되어 감에 따라 오로지 테크노라트의 언어가 되어버리면, 대중들에게 남는 것이란 파토스와 에토스로 가득 찬 스펙타클만 남는다. 선수들끼리의 언어는 어느덧 전문 테크노라트의 언어가 되어가는 반면, 또는 묘하게 뒤틀린 정치언어가 되어가는 반면, 대중들과의 소통은 언제나... 파토스와 에토스라는 시뮬라르크들의 전투장이 될 뿐이다.


진짜 이데올로기는 파토스와 에토스에 있지 않다. 잔인한 계산기이며, 잔인한 현실주의자인 체계의 편에 있으며, 이 체계의 작동자체가 또는 이 체계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믿음 자체가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이다.


강남좌파라는(절대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그 어떠한 재현의 토대도 없는 정치의 시뮬라르크가 한 웅큼의 열정을 담고 정치의 공간을 어슬렁 거릴 뿐이다.

 
[...]

여전히 믿고 싶은 것이 있다.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고, 원래 황혼이 가장 붉고 아름답게 한 낮이 스러져가는 광경이며, 어둠 속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홰치는 깃털소리로 마감이 되고, 기나긴 어둠을 견뎌야 한다면... 희미하고 희미한... 새벽이 빛을 기다리고 싶다.




고백이란... 또는 독백이란... 언제나 두서 없으며, 언제나 속마음을 가장 잘 숨기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다. 

by 클라투 | 2010/09/02 23:57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